새벽예배

제목막 12:1-12 악한 농부 비유2026-03-03 10:47
작성자 Level 10

막 12:1-12 악한 농부 비유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오늘 본문은 ‘악한 농부 비유’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는 품삯을 받고 농사를 대신 지어주는 ‘소작농’입니다.

소작농의 존재는 아무리 풍년이 와도 결실물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농부의 비유는 단순히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존재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결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워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와 사명이며, 농부들은 그것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포도원을 만든 이가 농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포도원을 계획하고, 울타리를 치고,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운 분은 주인입니다. 농부는 창조자가 아니라 맡겨진 자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청지기로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맡은 자입니다. 그러나 악한 농부들은 이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포도원이 자기 것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소출을 요구하는 종을 때리고 능욕하고 죽이면서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존재를 잘못 인식하면 소유 개념이 바뀌고, 소유 개념이 바뀌면 삶의 태도가 바뀝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우리는 반드시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 선언은 단순한 종교적 문장이 아니라 존재 규정입니다.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악한 농부들은 그 관계를 거부했습니다. 주인의 소출을 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인데, 그들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 종들은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복해서, 인내하며,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존재를 잊은 자들을 다시 불러 세우기 위해 계속해서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말씀을 거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규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는 당신의 백성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소유가 아니다’라는 선언과 같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그러나 농부들은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여기서 인간 존재의 타락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것을 차지하려는 욕망, 하나님을 제거하고 축복만 소유하려는 욕망, 관계는 거부하고 유산만 탐하는 욕망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 것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죽이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농부의 자격조차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이 그 아들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인용하십니다.

본문 10절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다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제거하면 자신들의 체제가 유지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 버림받은 아들을 통해 구원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존재를 잘못 인식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존재를 바로 인식하면 우리는 맡겨진 자로서 겸손히 열매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 재능, 물질, 사역, 교회, 가정, 심지어 생명까지도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맡겨진 것입니다. 이 고백이 무너지면 우리는 악한 농부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존재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하실까요.

인간은 쉽게 잊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지나며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도 가나안에 들어가면 스스로 잘난 줄 알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겸손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끊임없이 정체성을 상기시키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다. 너는 내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산 자다. 이 선언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하게 됩니다.

    

세상은 소유로 존재를 규정합니다.

무엇을 가졌는가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로 존재를 규정하십니다. 누구의 것인가로 정체성을 정하십니다.

 

악한 농부들은 포도원을 소유하려 했지만 결국 포도원을 잃었습니다. 반면 자신이 청지기임을 아는 자는 끝까지 기업을 받습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은 무겁습니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십니다. 은혜도, 기회도, 사명도 영원히 자동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인내하시지만,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존재를 부정하는 삶은 결국 존재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새벽에 우리가 이 말씀 앞에 서는 이유는 다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세움 받은 자입니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나는 소유자가 아니라 맡은 자입니다. 이 고백이 분명할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감사가 회복되고, 교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열매를 맺는 삶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바로 인식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나는 포도원의 주인처럼 살고 있는가, 아니면 맡겨진 자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로 부르셨고, 관계로 묶으셨고, 사명으로 세우셨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바로 아는 자만이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주인께 드리며, 머릿돌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존재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열매를 드리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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